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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찜찜한데 딱히 설명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저한테 이창동 감독 영화가 꼭 그렇습니다. 보는 중에도, 보고 나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중에야 "아, 이창동이었구나"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 개봉한 <버닝>도 그 목록에 들어 있는 영화입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을 정도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만, 정작 저는 보고 나서 "그래서?"라는 물음표만 남았습니다.

영화 버닝 계급 격차와 열등감,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한 것
영화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알바를 전전하는 청년 종수, 어린 시절 동창 해미, 그리고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데려온 남자 벤. 이 세 인물이 만들어내는 삼각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삼각형이 묘하게 불균형합니다.
종수는 임시직을 전전하며 생활고를 안고 사는 인물입니다. 반면 벤은 뚜렷한 직업도 없는데 강남에 고급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포르쉐를 몰며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습니다. 이 대비를 영화는 굉장히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들을 볼 때는 단순히 배경 설정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이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 격차(class divide)란 단순히 돈의 차이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어떤 사회적 위치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가 한 인간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종수가 벤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경쟁심이나 질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위화감, 좁혀지지 않는 거리. 이것이 종수를 잠식합니다.
평단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되 한국 사회의 청년 문제와 계층 갈등을 이창동 감독 특유의 미장센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소품 등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영화 기법입니다. 실제로 종수의 자취방과 벤의 아파트를 비교하는 장면 구성은 말보다 훨씬 강하게 그 거리를 체감하게 합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 계급 격차를 고발하거나 비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종수의 궁상맞은 현실도, 벤의 납득되지 않는 여유도, 그냥 나란히 놓아둡니다. 이런 방식이 불편하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불편함 자체가 이 영화의 의도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 종수: 임시직, 좁은 자취방, 아버지의 소 한 마리가 전 재산인 구조
- 벤: 직업 불명, 강남 고급 아파트, 포르쉐, 인맥과 여유로 가득 찬 일상
- 이 대비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영화 내내 유지되며 관객에게 불쾌한 긴장감을 남김
결말 해석, 살인은 해방인가 합리화인가
해미가 사라집니다. 연락도 끊깁니다. 종수는 신고를 하려 해도 물증이 없습니다. 심증만 있고, 심증이란 것은 법 앞에서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움직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다시 봤는데, 종수가 벤을 미행하고 조각 같은 단서들을 모아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해미가 여행 전 자신의 자취방에 맡긴 고양이 보일, 그 고양이를 벤의 집에서 발견하는 장면은 서사적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의 측면에서 꽤 강한 장치입니다. 서사적 개연성이란 이야기 안에서 어떤 사건이 논리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흐름을 갖추고 있는지를 뜻합니다. 고양이 장면은 종수의 직감을 관객도 함께 확신으로 바꾸도록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저한테 가장 황망했습니다. 종수는 벤을 칼로 죽이고, 차에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앤 뒤, 자신이 입었던 옷까지 불 속에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자신의 트럭에 올라타 떠납니다. 영화는 거기서 끝납니다. 어떤 죄의식도, 어떤 심판도, 어떤 후회도 없습니다.
이 결말을 두고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종수의 행위를 계급 사회에서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정의를 스스로 실현한 것으로 보는 읽기입니다. 알몸으로 트럭에 올라타는 장면을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 즉 억눌린 감정이 터져나오며 정화되는 순간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칸 영화제를 포함한 여러 평단에서 이 장면에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출처: 칸 국제영화제).
그런데 저는 솔직히 그 해석이 조금 불편합니다. 살인에 대한 합리화도 아니고 젊은이의 방황을 심도 있게 파고든 것도 아닌, 어딘가 애매한 지점에 영화가 멈춰 서 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살인범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것 아닌가 싶은 마음이 남습니다. 물론 이런 불편함이야말로 이창동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다 해도 저는 그 의도가 관객에게 과도하게 많은 해석의 짐을 떠넘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이 영화는 앰비규어스 내러티브(ambiguous narrative), 즉 의도적으로 결말을 열어두어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서사 구조의 대표작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앰비규어스 내러티브란 이야기 안에서 진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복수의 가능성이 공존하도록 설계된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 기법을 활용한 영화들은 국제 영화제에서 꾸준히 주목받아왔으며, 이창동 감독은 그 계보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출처: IMDb 버닝(2018)).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버닝에서 고양이 보일은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요, 종수의 망상인가요?
A.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물리적 증거는 없고, 고양이 밥그릇이 비워지는 장면만 반복됩니다. 이를 종수의 감정적 투영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존재하지만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이 모호함이 벤의 실체를 흐리는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Q. 버닝에서 벤이 실제로 해미를 죽인 건가요?
A. 영화는 끝까지 이것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벤의 집 욕실에서 해미의 물건처럼 보이는 것들이 발견되고, 고양이 보일이 그곳에 있다는 종수의 직감이 전부입니다. 앰비규어스 내러티브 구조를 택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종수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확신인지는 영화 안에서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말이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Q. 영화 버닝 원작 소설은 뭔가요?
A.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창동 감독은 원작의 뼈대만 가져오고 한국의 청년 계층 문제와 사회적 맥락을 대폭 덧붙였기 때문에,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영화가 됐습니다. 원작을 먼저 읽고 보면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옵니다.
Q. 칸 영화제에서 버닝이 받은 상은 뭔가요?
A. 2018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국제비평가연맹상(FIPRESCI Prize)을 수상했습니다. 황금종려상 후보로도 거론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입니다. 평단의 호평과 달리 일반 관객 반응은 엇갈렸는데, 저도 솔직히 후자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결론
제 경험상 이창동 감독 영화는 볼 때보다 본 뒤에 더 오래 머무는 편입니다. 불편한 채로 남아서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버닝도 그랬습니다. 다만 제가 이 영화에서 끝내 납득하지 못한 것은, 그 불편함이 무언가를 향해 쌓여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불편함 자체를 목적으로 설계된 것인지 가늠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 살인에 어떤 죄의식도 붙이지 않고 끝내는 선택을 두고 "그게 이창동 감독의 의도"라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의도가 곧 미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한 번 보시되, 명확한 결말을 기대하고 보시면 분명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겁니다. 오히려 그 물음표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보는 것이 맞는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B2%84%EB%8B%9D(%ED%95%9C%EA%B5%AD%20%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