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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현실을 그대로 복제해야 할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주인공 케이든 코타드가 뉴욕의 창고 안에 실제 도시를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에서, 이건 예술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완벽을 향한 욕망이 어떻게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시네도키, 뉴욕》은 그 과정을 2시간 넘게 아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시네도키 뉴욕 완벽주의가 예술을 삼킬 때
완벽주의(perfectionism)라는 말을 저는 꽤 오래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여기서 완벽주의란 단순히 꼼꼼한 성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류 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강박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이든이 딱 그랬습니다. 맥아더 펠로우십, 이른바 '천재 장학금'을 받은 직후 그가 선택한 건 안주가 아니라 더 큰 야망이었습니다.
케이든은 거대한 창고 안에 뉴욕 시내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비슷하게 생긴 배우를 캐스팅해 실제 삶을 살도록 지시하고, 그 위에 또 다른 층위의 무대를 얹습니다. 이 구조는 메타픽션(metafiction)과 맞닿아 있는데, 쉽게 말해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며 경계가 계속 무너지는 서사 방식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트루먼쇼가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다만 트루먼쇼의 연출자는 밖에서 통제했지만, 케이든은 자기 자신도 그 무대 안에 집어넣습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예술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현실에서 풀 수 없는 답답함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 해석이 케이든에게는 반쯤만 맞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 정복을 원했고, 그것이 파멸의 씨앗이었습니다.
- 맥아더 펠로우십 수상 후 오히려 더 극단적인 기획으로 이어짐
- 메타픽션 구조 — 무대 안에 무대, 역할 안에 역할이 계속 중첩됨
-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 복제·지배를 향한 욕망이 창작의 동력


통제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찰리 카우프만 감독은 이 영화에서 통제 욕구(control compulsion)를 아주 노골적으로 해부합니다. 통제 욕구란 외부 환경과 타인의 행동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율하려는 심리적 충동으로, 심리학에서는 이것이 과도해질 때 관계 손상과 자아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케이든은 자신을 연기할 배우를 따로 캐스팅합니다. 그 배우는 케이든을 관찰하고 따라 하며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 설정이 저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흥미로운 장치처럼 보였지만, 점점 그게 케이든의 자아 분열(ego fragmentation)을 상징한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자아 분열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흔들리며 정체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분들의 시각에 저는 동의합니다. 현실에서 통제하지 못한 것들 — 아내와의 불화, 딸과의 단절, 끊이지 않는 신체 증상들 — 을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하게 재현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병리적 경계에 닿아 있습니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예술이 현실을 흉내 내다가 결국 현실을 삼켜버리는 과정이 훨씬 더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자아붕괴, 그 허무한 결말에 대하여
영화의 결말은 케이든이 자신을 대신하는 역할의 인물에 의해 죽음을 맞는 형태로 마무리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결말은 그 순간엔 당혹스럽고 허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무겁게 남는 종류입니다. 수십 년을 들여 만든 연극, 결론을 맺지 못하고 폭파되듯 끝나는 이 서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존주의란 신이나 본질이 아닌 개인의 선택과 행위가 존재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케이든은 자신의 연극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지만, 그 의미를 완성하기 전에 죽습니다. 이 영화가 실존주의 영화로 분류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결국 완벽하려다가 무너진 사람의 이야기라고 단순하게 읽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이든의 실패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완벽에 대한 정의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닐까. 연극이 현실과 완전히 같아야 한다는 전제, 그 전제가 이미 예술을 불가능한 과제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직접 창작 작업을 해본 경험에서도, 완벽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무언가를 끝낸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시네도키, 뉴욕은 무슨 뜻인가요?
A. 제목의 '시네도키(Synecdoche)'는 수사학 용어로,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거나 전체로 부분을 표현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손이 필요하다"고 할 때 실제로 원하는 건 사람 전체인 것처럼요. 이 영화에서는 케이든의 삶이 인간 전체의 삶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이 개념이 적용됩니다. 거창한 제목처럼 느껴지지만, 볼수록 이 단어가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 영화가 어렵다는 말이 많던데 실제로 그런가요?
A. 솔직히 말하면, 어렵습니다. 시간 순서가 뒤섞이고 현실과 무대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흐려지기 때문에 한 번 봐서 모든 걸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줄거리를 이해하려는 것보다 케이든이 느끼는 감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보면 훨씬 덜 막힌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난해하다는 평가와 걸작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영화인데, 저는 두 평가 모두 맞다고 봅니다.
Q. 감독 찰리 카우프만의 다른 작품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A. 찰리 카우프만은 《이터널 선샤인》, 《어댑테이션》 등을 쓴 각본가이자 감독으로, 자아·기억·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네도키, 뉴욕》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카우프만의 다른 작품들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도 접근해볼 만합니다.
Q. 연극이 현실과 똑같아야 한다는 발상이 실제로 가능한 건가요?
A. 예술 이론적으로 보면, 연극은 늘 현실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현실을 100% 복제하는 무대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영화가 그 불가능함을 주인공이 끝내 깨닫지 못하는 구조로 설정했다는 점이 비극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재현을 목표로 삼는 순간, 예술은 이미 실패를 예약한 셈입니다.
결론
《시네도키, 뉴욕》을 보고 나서 제가 오래 붙잡고 있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완벽하게 만들지 못한 것은 실패인가, 아니면 완벽을 목표로 삼은 것 자체가 실패였는가. 케이든의 이야기는 통제 욕구와 완벽주의가 결합될 때 얼마나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사람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가 그 모습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을 포기하는 게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더 용기 있는 선택일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걸 케이든의 실패를 통해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에 처음 입문하는 분이라면 《이터널 선샤인》을 먼저 보고 이 영화로 넘어오는 순서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편이 이 영화의 무게를 좀 더 잘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8B%9C%EB%84%A4%EB%8F%84%ED%82%A4%2C%20%EB%89%B4%EC%9A%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