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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유능한 여성 리더를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이미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힌 편견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영화 「우리에겐 아직 내일이 있다」는 바로 그 편견이 당연하게 통용되던 시대, 이탈리아 여성들이 처음으로 참정권(Suffrage)을 얻게 되는 순간을 담은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한 로맨스물인 줄 알았던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내일이 있다 속 여성 참정권 이야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아직 내일이 있다(C'è ancora domani)」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막연히 가족 간의 화해나 희망을 다룬 따뜻한 드라마일 거라 짐작했습니다. 실제로 가족 이야기가 맞긴 합니다. 하지만 그 가족 이야기의 배경이 1946년 이탈리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폐허 속이고, 그 안에서 이탈리아 여성이 처음으로 참정권을 행사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핵심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정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영화는 이탈리아 배우이자 감독인 파올라 코르텔레시(Paola Cortellesi)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델리아(Delia)는 로마 빈민가에 사는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입니다. 남편 이바노(Ivano)에게 일상적인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하고, 딸의 결혼 문제까지 혼자 떠안습니다. 이 영화가 2023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해 자국 역대 흥행 5위 안에 드는 기록을 세웠고, 출처: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도 공식 상영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는 내내 불편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흑백 화면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네오리얼리즘(Neorealism) 미학을 의도적으로 차용했습니다. 여기서 네오리얼리즘이란 1940~5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유행한 사조로, 전쟁 이후의 척박한 현실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 선택 덕분에 델리아가 겪는 일상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유리천장은 하늘에만 있지 않았다, 집 안에도 있었다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그게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유리천장이란 여성이나 소수자가 능력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장벽 때문에 일정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차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장벽이 직장보다 훨씬 더 깊은 곳, 바로 가정 안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델리아의 남편 이바노는 악마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게 더 섬뜩합니다. 그는 그 시대의 평균적인 남성이었고, 아내를 때리는 것도, 아내의 수입을 당연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모두 그 사회에서 용인된 '정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건, 이 장면들이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제로 작동했던 사회 문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시대 가정폭력의 구조적 원인 중 하나는, 사회에서 좌절한 남성들이 유일하게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 가정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쌓인 무력감이 가장 약한 존재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이 구조를 바꾸려면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했고, 그 시작점이 바로 참정권이었습니다. 영화는 그 논리를 설교하지 않고, 델리아의 하루하루를 통해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탈리아 여성은 1946년 6월 2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습니다(출처: 씨네21). 그 역사적 사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맞닿는 순간, 저는 꽤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 1946년: 이탈리아 여성, 최초 참정권(투표권) 획득
- 당시 여성은 재산권·이혼권 모두 남성에게 종속된 상태였음
- 가정폭력은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닌 '가정사'로 취급되던 시대
- 영화는 이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비극이 아닌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프레이밍함

여성인권 영화가 불편한 이유, 그리고 그래도 희망인 이유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중간중간 웃음이 터져나온다는 점이었습니다. 파올라 코르텔레시는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형식으로 당대의 비극을 비틀어 표현합니다. 블랙 코미디란 비극적이거나 잔인한 현실을 웃음의 언어로 풀어내는 기법으로, 직접적인 고발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관객의 인식을 파고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웃다가 "아,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라는 자각이 오는 순간의 씁쓸함이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저는 무조건 남성을 비난하거나 여성 편만 드는 방식의 서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그런 이분법은 오히려 대화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균형 감각이 있습니다. 남성을 악인으로 그리는 대신, 그들 역시 시대의 문법에 갇힌 존재로 묘사합니다. 진짜 적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구조, 즉 페미니즘(Feminism)이 싸워야 했던 제도적 불평등이었습니다. 여기서 페미니즘이란 성별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추구하는 사회운동 전반을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던 건, 이 영화가 결국 "아직 내일이 있다"는 말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참정권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선거권은 얻었지만 여전히 가정에서, 직장에서, 크고 작은 장면에서 여성은 증명을 요구받습니다.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는 방향성을 이 영화는 끝까지 잃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역할에 성실하고, 서로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면서, 함께 방법을 찾아가는 유연함이 있다면 가정에서 폭력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단순한 진실을 이 영화는 80년 전 이탈리아 골목길을 배경으로, 아주 조용하고 힘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우리에겐 아직 내일이 있다, 어떤 영화인가요?
A. 2023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흑백 드라마 영화로, 파올라 코르텔레시가 감독과 주연을 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로마를 배경으로, 가정폭력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여성 델리아가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참정권 선거에 참여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블랙 코미디와 사회 비판을 섞은 연출이 특징입니다.
Q. 이탈리아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게 정말 1946년이에요?
A. 맞습니다. 이탈리아 여성은 1946년 6월 2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프랑스(1944년), 영국(1918년)보다 늦었고, 같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늦은 편에 속합니다. 영화는 그 역사적 날짜를 클라이맥스로 삼습니다.
Q. 페미니즘 영화라서 남성 혐오적인 내용이 많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남성을 일방적인 악인으로 그리지 않고, 시대의 구조 자체를 문제로 짚습니다. 남편 이바노도 그 시대의 문법을 따른 '평균'으로 묘사되며, 영화의 분노는 특정 인물이 아닌 제도적 불평등을 향합니다. 오히려 불편하지만 균형 있는 시선이 이 영화의 강점입니다.
Q. 왜 흑백 영화로 만들었나요?
A. 감독 파올라 코르텔레시는 1940~5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미학을 의도적으로 차용했습니다. 흑백 화면은 당대의 현실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이야기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임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화려한 반전이나 감동적인 독백이 아니었습니다. 델리아가 아무 말 없이, 그저 투표용지를 손에 쥐고 기표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뒷모습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그 한 걸음이, 수십 년간 쌓인 침묵을 깨는 가장 큰 소리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당연한 권리들이 누군가의 긴 싸움 끝에 얻어진 것임을 이 영화는 조용히 상기시켜 줍니다. 유리천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이미 변화입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내일이 있으니까요.
참고: 씨네21 영화 정보 / 부산국제영화제(BIFF)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