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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홀리 모터스 (페르소나, 진정성, 실존)

oceanpumpkin 2026. 10. 7. 10:50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홀리 모터스》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이상한 예술 영화 한 편 봤다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주인공 오스카가 리무진 안에서 다음 캐릭터로 분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관객도 카메라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연기를 이어가는 걸까. 그 질문이 결국 저를 이 글로 이끌었습니다.

     

    홀리 모터스 페르소나 — 우리가 매일 쓰고 벗는 얼굴

    《홀리 모터스》의 주인공 오스카는 하루에 아홉 개의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합니다. 거지 노파, 모션캡처 퍼포머, 괴물, 암살자, 임종을 맞는 아버지까지.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그 캐릭터들의 기이함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페르소나(Persona)란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외부에 드러내는 가면, 즉 타인의 기대에 맞게 연출된 자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칼 융이 제시한 개념으로, 원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에서 유래했습니다. 오스카의 아홉 가지 역할은 그 페르소나의 극단적 형태입니다.

    일반적으로 페르소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거울 앞에 서면 어딘가 연출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스카가 빈 무대에서도 연기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페르소나는 관객이 사라져도 습관처럼 작동합니다.

    영화는 이 점을 대놓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스카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래서 더 불편하고, 더 오래 남습니다.

    •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관계에서 외부로 드러내는 연출된 자아. 칼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
    • 오스카의 아홉 역할은 각기 다른 계층·감정·욕망을 대변하며 단일한 정체성을 해체함
    • 관객 없는 연기라는 설정은, 사회적 시선이 없어도 유지되는 자아의 연출성을 암시함
    요약: 오스카의 아홉 얼굴은 우리가 매일 쓰고 벗는 페르소나의 극단적 형상이며, 관객 없이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더 날카롭다.

     

    진정성 — 연기와 진심 사이의 거리

    한때 저는 진정성 없는 사람들을 상당히 신랄하게 재단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 싶으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거리를 뒀습니다. 그게 나름의 자기보호였는데, 지금 돌아보면 꽤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홀리 모터스》를 다시 꺼내서 본 건 그 생각이 흔들리고 나서였습니다. 오스카는 임종을 맞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영화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핵심입니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철학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진정성이란 실존주의 철학, 특히 장폴 사르트르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외부의 역할이나 기대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본래적 존재 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스카는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역할 하나하나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과 진심이 없는 상황은 다릅니다. 직장에서 괜찮은 척하고, 가족 앞에서 평온한 척하고, 친구 앞에서 건강한 척하는 것들이 모두 위선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살아남는 방식이고, 동시에 그 관계를 지키려는 의지일 수 있습니다. 진정성은 타인이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판단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요약: 진정성은 상대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 삶에 얼마나 진심인가의 문제이며, 연기와 진심은 공존할 수 있다.

     

    실존 —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걸렸던 질문이 있습니다. "오스카는 왜 하는 걸까?" 돈 때문도 아니고, 명예 때문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합니다. 아홉 번째 역할이 끝난 뒤 리무진으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에는 기쁨도 안도도 없습니다. 그냥 또 하루가 끝났을 뿐입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에서는 인간이 본질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실존주의란 인간이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오스카는 매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그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그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인지도 모릅니다(출처: 나무위키 홀리 모터스).

    저도 처음엔 이 영화를 그냥 형식 실험에 가까운 작품으로 봤습니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오스카의 반복적 수행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하고, 역할을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반복이 의미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극현실주의(Hyperrealism)적 표현 방식을 택한 작품들이 대중에게 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합니다. 여기서 극현실주의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냉정하게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나 감정을 거스르는 예술 경향을 말합니다. 《홀리 모터스》도 어떤 면에서는 그 경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이 영화는 설명이 아니라 감각으로 이해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며칠을 두고 천천히 스며들었습니다.

    요약: 오스카의 이유 없는 수행은 실존주의적 조건 그 자체이며, 이 영화는 설명 없이 그 감각을 직접 전달한다.

     

    타인을 재단하는 일 — 제가 부끄러웠던 이유

    《홀리 모터스》에서 오스카가 연기하는 인물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혐오스럽거나 폭력적인 존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락스는 그 어떤 인물도 단순히 나쁜 존재로 그리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판단하지 않고 그냥 따라갑니다. 처음에 저는 그게 불편했습니다. 뭔가 감독이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사실 제 문제였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타인의 행동에 의미를 붙이고, 진정성을 측정하고, 거기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 왔습니다. 진심이 안 느껴지는 사람은 위선자로 분류하고, 표면적인 친절은 계산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여겼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게 얼마나 좁은 시야였는지 알게 됐습니다. 착한 척, 괜찮은 척, 건강한 척하는 사람들 각자에게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까지 알고 싶지 않다면 판단도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 《홀리 모터스》가 말하는 것도 어쩌면 그것인지 모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출처: Cinémathèque française — 홀리 모터스 상영 기록).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타인을 성급하게 재단했던 시간들은 사실 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회피였던 것 같습니다. 오스카가 매 역할에 전부를 던지면서도 판단받지 않는 그 화면을 보면서, 저는 그 부끄러움을 오래 붙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요약: 타인의 진정성을 재단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좁은 시야를 드러낼 뿐이며,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주 묻는 질문

    Q. 홀리 모터스는 줄거리가 있는 영화인가요?

    A. 일반적으로 줄거리가 명확한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주인공 오스카가 하루 동안 아홉 개의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옴니버스 형식에 가깝습니다. 각 에피소드가 서사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제 경험상 두 번째 볼 때 오히려 더 많이 보였습니다.

     

    Q.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 한 건가요?

    A. 카락스 감독 본인은 의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되지만 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강점입니다. 실존, 정체성, 예술의 목적 등 여러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Q. 페르소나 개념을 영화 없이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나가 조금씩 다르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이미 페르소나의 작동입니다. 일반적으로 페르소나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제 경험상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자연스러운 기제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페르소나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완전히 분리될 때입니다.

     

    Q. 진정성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A. 저도 한때는 그런 사람을 솎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진정성 없다'는 판단 자체가 상대의 맥락을 모르고 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과 진심이 없는 상황은 다릅니다. 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내가 그 사람의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쪽이 낫다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결론

    《홀리 모터스》는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감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불친절함이 며칠 뒤에 조용히 찾아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타인에게 해 왔던 판단들을 꽤 오랫동안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진정성은 타인이 측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 연기하는 사람도 자기 삶에 진심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 세 가지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예술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이라면, 줄거리를 따라가려 하지 말고 그냥 오스카의 얼굴을 한번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익숙한 얼굴일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99%80%EB%A6%AC%20%EB%AA%A8%ED%84%B0%EC%8A%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