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당한 사람이 스스로도 불륜을 저지를 뻔했다면, 그걸 참아낸 게 정말 '선한 결말'일까요. 왕가위 감독의 2000년작 〈화양연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습니다.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두 남녀가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 감정을 스스로 끊어내는 이야기.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뜻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은 그 어떤 찬란함보다 훨씬 무겁고 복잡합니다. 화양연화 배신의 고통을 내면화하다 — 승화의 역설〈화양연화〉의 구조를 처음 분석했을 때, 제가 가장 주목한 심리 기제는 '내면화(internalization)'였습니다. 내면화란 외부에서 오는 충격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지 않고 자기 안쪽으로 삭이는 심리 과정을 말합..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은 아름다운데, 이야기는 자꾸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이 오래 남았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 불편함이 사실 영화가 제 안에서 건드린 무언가였던 것 같습니다. 방향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낯설지 않을 겁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방향 상실 — 목표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를 꿈꾸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베티, 그리고 기억을 잃은 채 길을 헤매는 리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기억 상실(amnesia)이라는 장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기억 상실이란 단순히 의학적 증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감독 데이비드 린치는 이것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잃어버린 상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