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면서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데 둘 다 아무 말을 못 했습니다. 제가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가 그랬습니다. 2000년 개봉작인 이 영화는 단기 기억 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이 아내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심리 스릴러인데, 스크린 앞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를 본 건가"라는 물음만 남았습니다. 결국 저는 개봉 기간 중에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생전 처음 있는 일을 저질렀고, 그제야 비로소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조금씩 윤곽이 잡혔습니다.두 번 봐야 보이는 것들 — 비선형 서사의 함정일반적으로 메멘토는 "시간 순서를 뒤집어 놓은 영리한 구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첫 관람에서 느낀 건 영리함이 아니라 순수한 당혹감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에서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서 제가 사실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2006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분명히 봤고, '잔혹 동화'라는 인상만 강렬하게 남아 있었는데, 줄거리를 떠올리려 하니 거의 백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봤고, 나이가 든 눈으로 마주한 《판의 미로》는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판의 미로 기억이 틀렸다 — 다시 본 영화가 새로운 이유영화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습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는데, 제 머릿속에 남은 것이 '손바닥에 눈이 달린 괴물'과 '피를 흘리는 장면' 두 개뿐이었습니다. 혹시 제가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틀었습니다.다시 보니 이유가 명확했습니다. 당시 제가 ..
저도 처음엔 "원스" 같은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이 교감하고, 뭔가 뭉클한 결말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인사이드 르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예상을 정확히 비껴갔습니다. 볼품없고 지저분하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포크 뮤지션의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포크 음악, 낭만인 줄만 알았습니다"원스"를 보고 한동안 영화음악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두 남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선택이 이해됐고, 장면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서사 그 자체였습니다. 나중에는 음악만 들어도 영화 장면이 그대로 떠오를 정도였으니까요.그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였을까요. 코엔 형제 감독의 《인사이드 르윈》을 고른 것도 비슷한 감동을 기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은 아름다운데, 이야기는 자꾸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이 오래 남았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 불편함이 사실 영화가 제 안에서 건드린 무언가였던 것 같습니다. 방향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낯설지 않을 겁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방향 상실 — 목표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를 꿈꾸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베티, 그리고 기억을 잃은 채 길을 헤매는 리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기억 상실(amnesia)이라는 장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기억 상실이란 단순히 의학적 증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감독 데이비드 린치는 이것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잃어버린 상태 ..
영화가 픽션으로 끝날 수 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 처음 개봉했을 때, 극장을 나서며 친구들과 나눈 토론의 결말은 늘 똑같았습니다. "영화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한마디로 더 이상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AI가 일상 속에 깊이 들어온 지금, 제가 그 영화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건 과민 반응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인셉션 꿈을 조작한다는 게 말이 되는 설정일까꿈이 단순한 수면 중 뇌 활동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시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 동안 꿈은 영혼의 영역, 혹은 무의식이 말을 거는 통로로 여겨져 왔습니다. 프로이트가 꿈을 "억압된 욕망의 발현"으로 정의한 것도, 융이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