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나오면서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데 둘 다 아무 말을 못 했습니다. 제가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가 그랬습니다. 2000년 개봉작인 이 영화는 단기 기억 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이 아내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심리 스릴러인데, 스크린 앞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를 본 건가"라는 물음만 남았습니다. 결국 저는 개봉 기간 중에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생전 처음 있는 일을 저질렀고, 그제야 비로소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조금씩 윤곽이 잡혔습니다.두 번 봐야 보이는 것들 — 비선형 서사의 함정일반적으로 메멘토는 "시간 순서를 뒤집어 놓은 영리한 구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첫 관람에서 느낀 건 영리함이 아니라 순수한 당혹감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에서 ..
완벽한 스승을 찾으면 불안이 사라질까요? 저는 한때 그렇게 믿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2012)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귀환 병사의 이야기를 통해 그 믿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조용하고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직접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오래 찾아 헤맸던 질문과 너무 닮아 있어서, 보는 내내 꽤 불편했습니다. 마스터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 것들영화의 주인공 프레디 퀠은 태평양 전쟁에서 돌아온 해군 병사입니다. 그는 알코올에 절어 있고, 충동적이며,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전형적인 증상처럼 보이지만, 1950년대 미국에는 그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PTSD란 극단적 사건을 경험한..
역사의 죄책감을 외면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히든》(2005)은 바로 그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영화입니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 프랑스가 알제리인을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완전히 낯선 역사였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나라가 그런 과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히든 1961 파리 학살, 제가 몰랐던 역사《히든》의 핵심 배경은 1961년 파리 학살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파리 시내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알제리인 수백 명을 학살했습니다. 일부는 센강에 던져졌고, 프랑스 정부는 수십 년간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독일의 홀로코스트나 ..
낯선 도시에서 잠 못 이루는 새벽, 호텔 바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묘하게 솔직해집니다. 저도 출장지에서 그런 밤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그 감각을 정확히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도쿄라는 낯선 공간에서 방황하는 두 이방인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제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이방인끼리 만나면 — 영화의 배경과 맥락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2003년에 내놓은 이 영화는 도쿄의 한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은 두 명입니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시달리는 중년 배우 밥 해리스(빌 머레이 분), 그리고 유명 사진작가의 아내로 도쿄에 따라왔지만 정작 혼자 남겨진 샬럿(스칼렛 요한슨 분)입니다...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봤다가 뒤통수를 맞은 영화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제목만 보면 낭만적인 여행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살인과 탈옥, 암투와 죽음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입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내내 "과연 이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되뇌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배경과 서사 — 왜 하필 '호텔'이어야 했을까?호텔을 배경으로 삼은 범죄 서사라니,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건 단순한 배경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호텔이라는 공간은 모든 계층의 사람이 드나들고, 비밀이 오가고, 권력이 집결하는 곳입니다. 영화는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활용합니다.이야기는 3중 액자 구조(f..
연극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현실을 그대로 복제해야 할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주인공 케이든 코타드가 뉴욕의 창고 안에 실제 도시를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에서, 이건 예술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완벽을 향한 욕망이 어떻게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시네도키, 뉴욕》은 그 과정을 2시간 넘게 아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시네도키 뉴욕 완벽주의가 예술을 삼킬 때완벽주의(perfectionism)라는 말을 저는 꽤 오래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여기서 완벽주의란 단순히 꼼꼼한 성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류 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강박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이든이 딱 그랬습니다. 맥아더 펠로우십, 이른바 '천재 장학금'을 받은 직후 그..
블록버스터 영화가 환경 다큐멘터리보다 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 속 황폐한 세계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 우리 발밑에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무언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매드 맥스 영화가 담은 환경 메시지, 논문보다 더 세게 꽂히는 이유2015년 개봉 당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출처: IMDb Awards). 기술적 완성도로 주목받은 작품이었지만, 저는 조지 밀러 감독이 그 화려한 외피 안에 무엇을 넣어두었는지에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영화의 배경은 핵전쟁 이후 자원 고갈이 ..
처음엔 그냥 흑백 유럽 영화 한 편 보려고 틀었습니다. 1910년대 독일의 작은 마을 이야기라길래 느긋하게 볼 생각이었는데, 30분도 채 안 돼서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하얀 리본》은 순결과 죄책감을 무기로 삼는 권위자가 한 공동체를 어떻게 조용히 망가뜨리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망가진 공동체의 이름이 '독일'이었다는 사실이,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얀 리본 흰 리본이 상징하는 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습니다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순결이나 희망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영화 속 하얀 리본의 정체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을 목사는 자녀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팔에 흰 리본을 달아 줍니다.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죄를,..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서 제가 사실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2006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분명히 봤고, '잔혹 동화'라는 인상만 강렬하게 남아 있었는데, 줄거리를 떠올리려 하니 거의 백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봤고, 나이가 든 눈으로 마주한 《판의 미로》는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판의 미로 기억이 틀렸다 — 다시 본 영화가 새로운 이유영화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습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는데, 제 머릿속에 남은 것이 '손바닥에 눈이 달린 괴물'과 '피를 흘리는 장면' 두 개뿐이었습니다. 혹시 제가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틀었습니다.다시 보니 이유가 명확했습니다. 당시 제가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홀리 모터스》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이상한 예술 영화 한 편 봤다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주인공 오스카가 리무진 안에서 다음 캐릭터로 분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관객도 카메라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연기를 이어가는 걸까. 그 질문이 결국 저를 이 글로 이끌었습니다. 홀리 모터스 페르소나 — 우리가 매일 쓰고 벗는 얼굴《홀리 모터스》의 주인공 오스카는 하루에 아홉 개의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합니다. 거지 노파, 모션캡처 퍼포머, 괴물, 암살자, 임종을 맞는 아버지까지.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그 캐릭터들의 기이함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심리학에서 말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