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그냥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01년작 은 열 살짜리 소녀가 이세계에 떨어져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성인동화 한 편을 읽은 것 같은 묘한 무게감을 남깁니다. 제가 이 작품을 다시 꺼내 든 건 어른이 된 이후였고, 그제야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세계로 빨려 든 치히로, 그 시작이 섬뜩한 이유영화는 평범한 이사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부모님과 차를 타고 달리다 낯선 터널 앞에 멈춰 서게 되는 치히로. 저는 이 장면에서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는데, 그게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불안감이었습니다. 터널..
미국 석유 산업 초창기, 한 남자가 맨손으로 백만장자가 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을 모조리 잃는다. 2007년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가 그 이야기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미국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는 낯선 당혹감이었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석유사업의 민낯 — 자본주의 원시 시대의 기록영화의 실제 모티브는 19~20세기 초 미국의 실존 석유왕 에드워드 도헤니(Edward Doheny)입니다. 에드워드 도헤니는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석유를 발굴해 거대한 부를 쌓은 인물로, 이른바 '석유 러시(Oil Rush)'의 상징이었습니다. 여기서 석유 러시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서부와 남부 일대에서 석유 매장지를 선점하기 위해 사업가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시추..
불륜을 당한 사람이 스스로도 불륜을 저지를 뻔했다면, 그걸 참아낸 게 정말 '선한 결말'일까요. 왕가위 감독의 2000년작 〈화양연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습니다.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두 남녀가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 감정을 스스로 끊어내는 이야기.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뜻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은 그 어떤 찬란함보다 훨씬 무겁고 복잡합니다. 화양연화 배신의 고통을 내면화하다 — 승화의 역설〈화양연화〉의 구조를 처음 분석했을 때, 제가 가장 주목한 심리 기제는 '내면화(internalization)'였습니다. 내면화란 외부에서 오는 충격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지 않고 자기 안쪽으로 삭이는 심리 과정을 말합..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면은 아름다운데, 이야기는 자꾸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한 감정이 오래 남았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 불편함이 사실 영화가 제 안에서 건드린 무언가였던 것 같습니다. 방향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낯설지 않을 겁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방향 상실 — 목표가 사라졌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를 꿈꾸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베티, 그리고 기억을 잃은 채 길을 헤매는 리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기억 상실(amnesia)이라는 장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기억 상실이란 단순히 의학적 증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감독 데이비드 린치는 이것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잃어버린 상태 ..
누군가와 깊이 연결됐다고 느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우리 사이에 처음부터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적이 있습니다. 영화 을 보고 나서 그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고, 카메라가 꺼진 뒤에는 각자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촬영이 끝나면 인연도 끝난다는 그 구조가, 생각보다 훨씬 아팠습니다. 가능한 사랑 계급의 경계, 우정인 척 숨어 있던 것장례식장이라는 공간이 참 묘합니다. 평소엔 마주칠 일 없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게 되는 곳이니까요. 영화 속 호식 부부와 상우 부부가 처음 만나는 것도 그런 장면입니다. 호식은 해고 노동자이고 상우는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둘 사이..
오래전 출근길에 타워크레인 위에서 현수막을 펼친 채 농성 중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단편영화 (2022)는 바로 그 장면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다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설경구와 전도연이 연기한 부부의 삶을 통해, 우울증(Depression)이 한 가정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짧고 날카롭게 포착해냅니다. 심장소리 아이가 느끼는 불안, 어른은 얼마나 알까영화는 타워크레인 위 아버지와 방 안에서 무너지는 어머니, 그 사이에 낀 아이를 보여줍니다. 제가 실제로 목격했던 타워크레인 농성 장면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어른에게도 불안한 광경인데, 그게 자기 아버지라면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아동 발달 심리학에서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찜찜한데 딱히 설명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저한테 이창동 감독 영화가 꼭 그렇습니다. 보는 중에도, 보고 나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중에야 "아, 이창동이었구나"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 개봉한 도 그 목록에 들어 있는 영화입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을 정도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만, 정작 저는 보고 나서 "그래서?"라는 물음표만 남았습니다. 영화 버닝 계급 격차와 열등감,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한 것영화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알바를 전전하는 청년 종수, 어린 시절 동창 해미, 그리고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데려온 남자 벤. 이 세 인물이 만들어내는 삼각 구도입니다. 그런데 이 삼각형이 묘하게 불균형합니다.종수는 임시직을 전전..
주변에서 치매 어르신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면, 영화 속 장면이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작 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60대 여성 미자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윤여정 배우의 와 거의 연달아 봤는데, 두 편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늙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주제였나 싶었습니다. 영화 시 알츠하이머를 가진 여자가 시를 쓴다는 것영화 의 주인공 미자는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 초기 진단을 받습니다. 알츠하이머란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손상되며 기억력과 언어 능력, 판단력이 단계적으로 저하되는 퇴행성 신경질환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병입니다.일반적으로 치매를 다룬 영화라고 하면 기억을 잃..
교도소 면회실에서 살인범이 웃고 있었습니다. 평온한 얼굴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앞에서. 제가 영화 밀양(2007)을 처음 봤을 때 그 장면에서 손에 땀이 났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종교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용서는 과연 누구의 권리인가. 이 영화는 그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밉니다. 밀양 용서의 구조 —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하는가영화 밀양은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의 연기로 더 유명하지만, 제가 주목한 건 수상 기록보다 이창동 감독이 설계한 서사 구조였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닙니다. 용서의 주체성(agency), 즉 누가 용서할 권리를 갖는가라는 윤리철학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체성이란 어떤 행위를 시작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격..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개봉 당시에도,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훑으며 재관람한 지금도, 영화 오아시스는 저에게 여전히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남깁니다. 이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뿌리를 파고들다 보니 결국 저 자신의 편견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습니다. 오아시스 불편함의 정체 — 스크린 앞에서 찌푸려진 미간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은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뭔가 보면 안 될 것을 보는 것 같은 불편함이었습니다. 교통사고 피해자의 집을 찾아간 홍종두가 그 집에 홀로 방치된 장애인 한공주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그랬습니다.홍종두는 형사 미성년자 성추행죄가 아닌 뺑소니 교통사고로 교도소에 다녀온 인물입니다. 여기서 '뺑소니'란 사고 후 피해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