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에서 낙태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간 형사처벌 대상이었습니다. 단순히 법이 금지한 게 아니라, 임신 4개월 이상의 태아를 처리한 시술자에게는 살인죄에 준하는 혐의가 적용되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그 숫자 하나에서 이미 숨이 막혔습니다. 4개월. 그 경계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는 것이.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사회주의 체제가 낙태를 어떻게 범죄로 만들었나차우셰스쿠 정권은 1966년 인구 증가 정책의 일환으로 낙태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이를 프로나탈리즘(pro-natalism)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국가가 출산을 장려하는 것을 넘어 강제하는 이념으로, 개인의 신체 자율권보다 국가의 인구 목표가 우선시되는 구조입니다. 그 결과 루마니아에서는 19..
1965년 인도네시아 반공 숙청으로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적게는 50만, 많게는 1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 잔혹행위의 가해자들이 지금도 훈장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로 처음 확인했을 때, 솔직히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분노인지 허탈인지 구분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화면을 보면서 계속 한국이 겹쳐 보였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 가해자가 영웅이 되는 나라《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2012년 완성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섬뜩합니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 군부 쿠데타 이후 벌어진 반공주의적 집단학살(mass killing)의 실행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그 살인 장면을 직접 재연(reenactmen..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년 전 영화를 다시 꺼내 보면서 이렇게 묵직하게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2006년작 《칠드런 오브 맨》이 그려낸 2027년은 허구라기보다 진지한 경고처럼 읽혔습니다. 환경 학살(ecocide)로 인류가 생식력을 잃고, 18년간 단 한 명의 아기도 태어나지 않는 세계. 요즘 뉴스에서 네팔 빙하 붕괴 소식을 접하고 나니, 이 영화의 디스토피아가 마냥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칠드런 오브 맨 환경 학살이 현실이 된다면 — 영화 속 팩트《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연출한 SF 디스토피아 영화입니다. 배경은 2027년, 인류가 환경 학살(ecocide) 끝에 집단적 생식력 상실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한 세계입니다. 여기서 환경 학살(ecocide..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화면은 그냥 꺼졌습니다. 《조디악》(2007)은 실제 미제사건(未解決事件)을 다룬 영화입니다. 1960~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를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집요하게 따라간 작품입니다. 찝찝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 조디악 미제사건이 남긴 것 — 잡히지 않은 범인의 초상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었습니다. 오랜 수사 끝에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조디악도 결국 같은 결말이었습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수사는 흐지부지 끝..
저도 처음엔 "원스" 같은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이 교감하고, 뭔가 뭉클한 결말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인사이드 르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예상을 정확히 비껴갔습니다. 볼품없고 지저분하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포크 뮤지션의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포크 음악, 낭만인 줄만 알았습니다"원스"를 보고 한동안 영화음악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두 남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선택이 이해됐고, 장면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서사 그 자체였습니다. 나중에는 음악만 들어도 영화 장면이 그대로 떠오를 정도였으니까요.그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였을까요. 코엔 형제 감독의 《인사이드 르윈》을 고른 것도 비슷한 감동을 기대..
요르단과 시리아 접경 난민촌에서 6개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랍 문화권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며 지냈는데,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란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극히 사적인 갈등을 다루는데, 낯선 나라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느낀 건 낯섦이 아니라 묘한 기시감이었습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란영화가 이렇게 솔직할 수 있다고?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란은 제가 중동을 경험하면서도 직접 가보지 못한 나라입니다. 아랍권에서 워낙 영향력이 큰 나라라 모를 수는 없었지만, 그 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줄은 몰랐습니다.《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2011년 아스가르 ..
2024년 기준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전체의 35.5%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통계청). 이 숫자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양 감독의 2000년 작 을 보고 난 뒤에는, 그 숫자가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 대만 가족 서사가 건네는 것들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일본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적인 화면 구성, 일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시선, 감정을 최소한의 대사로 전달하는 방식이 어쩐지 오즈 야스지로 계열의 느낌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극 중반쯤 되어서야 이게 대만 영화라는 걸 인식했습니다. 어린 시절 홍콩 영화를 꽤 챙겨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만 특유의 정서 앞에서는 생경함을 느꼈습니다.은 대만의 중산층 가족 지앙 씨 일가를 중심으로, 할머니부..
기억을 지운다고 사랑도 지워질까요? 2004년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 질문 하나로 시작합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여운이 생각보다 꽤 오래갔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추억이 관계를 붙잡는다는 건, 사실일까요?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턱 해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성향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그 차이 때문에 끌렸고, 또 그 차이 때문에 자주 다퉜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쌓이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관계에서 추억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구나"였습니다. 두 사람이 싸우면서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함께 쌓은 시..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몇 달씩 연락을 끊어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2011)가 단순한 영화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스크린 속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갈등과 화해, 그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들.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건드립니다. 트리 오브 라이프 가족 갈등,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트리 오브 라이프》는 1950년대 미국 텍사스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장남 잭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아버지는 권위주의적 훈육자(authoritarian parent)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권위주의적 훈육자란,..
《보이후드》는 실제 배우들과 12년을 함께 촬영하며 완성한 영화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한 아이의 6세부터 18세까지를 같은 배우로 담아냈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실감이 됐습니다. 보이후드 빈둥지증후군, 미국 엄마도 예외가 아니었다일반적으로 미국 부모는 자녀를 독립적으로 키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믿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영화 속 어머니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 분)는 자녀 둘을 대학에 보내던 날,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 삶이 끝난 것 같다"고.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미국 어머니에게서 한국 어머니의 정서를 읽게 될 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