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잠 못 이루는 새벽, 호텔 바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묘하게 솔직해집니다. 저도 출장지에서 그런 밤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그 감각을 정확히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도쿄라는 낯선 공간에서 방황하는 두 이방인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제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이방인끼리 만나면 — 영화의 배경과 맥락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2003년에 내놓은 이 영화는 도쿄의 한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은 두 명입니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시달리는 중년 배우 밥 해리스(빌 머레이 분), 그리고 유명 사진작가의 아내로 도쿄에 따라왔지만 정작 혼자 남겨진 샬럿(스칼렛 요한슨 분)입니다...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봤다가 뒤통수를 맞은 영화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제목만 보면 낭만적인 여행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살인과 탈옥, 암투와 죽음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입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내내 "과연 이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되뇌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배경과 서사 — 왜 하필 '호텔'이어야 했을까?호텔을 배경으로 삼은 범죄 서사라니,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건 단순한 배경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호텔이라는 공간은 모든 계층의 사람이 드나들고, 비밀이 오가고, 권력이 집결하는 곳입니다. 영화는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활용합니다.이야기는 3중 액자 구조(f..
연극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현실을 그대로 복제해야 할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주인공 케이든 코타드가 뉴욕의 창고 안에 실제 도시를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에서, 이건 예술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거든요. 완벽을 향한 욕망이 어떻게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시네도키, 뉴욕》은 그 과정을 2시간 넘게 아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시네도키 뉴욕 완벽주의가 예술을 삼킬 때완벽주의(perfectionism)라는 말을 저는 꽤 오래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여기서 완벽주의란 단순히 꼼꼼한 성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류 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강박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이든이 딱 그랬습니다. 맥아더 펠로우십, 이른바 '천재 장학금'을 받은 직후 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홀리 모터스》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냥 이상한 예술 영화 한 편 봤다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주인공 오스카가 리무진 안에서 다음 캐릭터로 분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관객도 카메라도 없는 공간에서 그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연기를 이어가는 걸까. 그 질문이 결국 저를 이 글로 이끌었습니다. 홀리 모터스 페르소나 — 우리가 매일 쓰고 벗는 얼굴《홀리 모터스》의 주인공 오스카는 하루에 아홉 개의 서로 다른 인물을 연기합니다. 거지 노파, 모션캡처 퍼포머, 괴물, 암살자, 임종을 맞는 아버지까지. 이 영화에서 저를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그 캐릭터들의 기이함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심리학에서 말하는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화면은 그냥 꺼졌습니다. 《조디악》(2007)은 실제 미제사건(未解決事件)을 다룬 영화입니다. 1960~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를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집요하게 따라간 작품입니다. 찝찝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오래 남는 영화였습니다. 조디악 미제사건이 남긴 것 — 잡히지 않은 범인의 초상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었습니다. 오랜 수사 끝에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조디악도 결국 같은 결말이었습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수사는 흐지부지 끝..
요르단과 시리아 접경 난민촌에서 6개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랍 문화권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며 지냈는데,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이란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극히 사적인 갈등을 다루는데, 낯선 나라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느낀 건 낯섦이 아니라 묘한 기시감이었습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란영화가 이렇게 솔직할 수 있다고?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란은 제가 중동을 경험하면서도 직접 가보지 못한 나라입니다. 아랍권에서 워낙 영향력이 큰 나라라 모를 수는 없었지만, 그 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줄은 몰랐습니다.《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2011년 아스가르 ..
2024년 기준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전체의 35.5%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통계청). 이 숫자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양 감독의 2000년 작 을 보고 난 뒤에는, 그 숫자가 갑자기 다르게 읽혔습니다. 하나 그리고 둘 대만 가족 서사가 건네는 것들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일본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적인 화면 구성, 일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시선, 감정을 최소한의 대사로 전달하는 방식이 어쩐지 오즈 야스지로 계열의 느낌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극 중반쯤 되어서야 이게 대만 영화라는 걸 인식했습니다. 어린 시절 홍콩 영화를 꽤 챙겨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만 특유의 정서 앞에서는 생경함을 느꼈습니다.은 대만의 중산층 가족 지앙 씨 일가를 중심으로, 할머니부..
기억을 지운다고 사랑도 지워질까요? 2004년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 질문 하나로 시작합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여운이 생각보다 꽤 오래갔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추억이 관계를 붙잡는다는 건, 사실일까요?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턱 해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성향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그 차이 때문에 끌렸고, 또 그 차이 때문에 자주 다퉜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쌓이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관계에서 추억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구나"였습니다. 두 사람이 싸우면서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 함께 쌓은 시..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몇 달씩 연락을 끊어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2011)가 단순한 영화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스크린 속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갈등과 화해, 그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들.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건드립니다. 트리 오브 라이프 가족 갈등,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트리 오브 라이프》는 1950년대 미국 텍사스의 한 가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장남 잭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아버지는 권위주의적 훈육자(authoritarian parent)로 묘사됩니다. 여기서 권위주의적 훈육자란,..
미국 석유 산업 초창기, 한 남자가 맨손으로 백만장자가 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을 모조리 잃는다. 2007년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가 그 이야기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미국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는 낯선 당혹감이었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석유사업의 민낯 — 자본주의 원시 시대의 기록영화의 실제 모티브는 19~20세기 초 미국의 실존 석유왕 에드워드 도헤니(Edward Doheny)입니다. 에드워드 도헤니는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석유를 발굴해 거대한 부를 쌓은 인물로, 이른바 '석유 러시(Oil Rush)'의 상징이었습니다. 여기서 석유 러시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서부와 남부 일대에서 석유 매장지를 선점하기 위해 사업가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시추..